상실의 본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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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다.
최근 애도상담 교육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를 상실한 지 2년쯤 된 한 참가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아직도 많이 슬프고 힘들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매일 어머니에게 전화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엄마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어디 전화할 때가 없어서 더 힘들어요. 언젠가 그 번호로 전화를 하니 다른 사람이 받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더 마음이 슬퍼요. 아직도 밤이면 슬픈 마음에 눈물을 흘려요. 근데, 사람들이 제가 너무 유별나게 그러는 것 아니냐고. 2년이나 지났는데 이만하면 됐다고 말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과정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마음을 이해해주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도록 도왔다. 그러다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제가 보기에는 애도의 과정을 잘 보내시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그녀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너무 감사해요. 제게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모두가 제가 이상하다고 말했지요...”
보통 비탄과 애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상실한 대상과의 관계성, 과거 상실의 경험들, 신앙의 정도, 공동체성, 죽음의 유형, 문화적 차이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있어 느끼는 감정도 다르고, 애도의 기간에도 차이가 있으며, 슬픔의 강도 또한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잣대로 슬픔을 진단하거나 비교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때로,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태도라고 가정하는 많은 것들 때문에 개인의 독특한 경험이 무시 당하게 된다. 이러한 무시는 부당한 것이며, 더 나아가 이미 상처받은 사람에게 더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어머니 사별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애도의 과정을 잘 보내지 못한 사람이 최근 아버지 상실을 경험했다면, 적절히 애도하지 못한 과거의 슬픔이 중복되어 복잡한 애도의 과정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별로 인한 슬픔은 한 번에 완전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간만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사별의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서서히 어루만져 주어야 할 ‘돌봄’의 대상인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현재 겪는 슬픔의 다양한 감정들을 마주하고 하나하나 표현할 수 있는 시간들을 보내면서 자신의 마음을 만나는 기회를 갖는다면 좋은 애도를 위한 한 걸음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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